주일 말씀


"큰 음녀가 받을 심판" (요한계시록 17장 1~5절)

2018-11-04

큰 음녀가 받을 심판(계17:1-5)

 

요한계시록의 구조

서론

1:1-8

본론

환상1

1:9-3:33

일곱촛대

교회

환상2

4:1-16:21

일곱인, 나팔, 대접

세상

환상3

17:1-20:15

큰 성 바벨론

세상

환상4

21:1-22:5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교회

결론

22:6-21

 

세 번째 환상(17:1-20:15)의 주요내용

1

큰 성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

(17:1-19:10)

2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심판과 멸망

(19:11-21)

3

용(사탄)의 심판과 멸망

(20:1-10)

4

불신자들의 심판과 멸망

(20:11-15)

 

17장은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일반적 묘사인데 서두는 음녀에 대한 심판예고로 시작한다.

1절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이 17장 이후의 일을 누가 보여주나? 일 곱 대접을 가진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보여준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일들을 설명해 주는 것도 그 천사다.

 

‘이리로 오라’하며, 무엇을 보여주겠다고 했나?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이다. (음녀/음탕한 여자, 부도덕하고 방탕한 자.)

 

여기서 음녀는 바벨론을 말한다. 어떻게 알 수 있나?

18절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큰 성은 계16:19에서 바벨론이라고 했다. “...큰 성 바벨론이...“

이 음녀가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는지 많은 물 위에 앉았다고 표현했다.

15절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여러나라, 여러민족, 여러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왜냐면 이들이 모두 물이 풍부한 강을 중심으로 번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큰 음녀(창녀)는 많은 나라,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굉장한 권력과 영광과 영향력이 있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앉아있는-영향력 아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 세상 권세 잡은 자와 그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벨론을 왜 음녀라고도 부르는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가리켜 ‘창녀, 음녀, 간음 한 자’라고 부른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창녀 고멜이 바로 진정한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한 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우상을 좇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간음했다’라고 말씀하셨다.

 

사1:21-22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22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보라, 패역한 이스라엘을 가리켜 창기라고 부르지요?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던 자들인가?

하나님이 아닌 은과 포도주를 추구하던 자들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힘,

은과 포도주를 추구하는 자들을 성경은 창기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다른 말로는 우상 숭배라고도 부른다.

엡5: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보라, 성경은 이렇게 음행과 더러운 것, 탐하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음행의 영적 의미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우상 숭배’를 말한다. 따라서 음행을 조장하는 음녀는, 하나님 말고 다른 힘 즉,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마귀의 세력을 가리킨다. 그게 바로 바벨론이다. 그래서 바벨론을 음녀라고도 부른다.

 

그러니까 예배당 안에서 세상의 힘을 약속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겠노라고 예배당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간음을 하게 만드는 악한 행위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이러한 경고를 하셨다.

 

요일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세상의 힘을 추구하게 만드는

음녀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권능의 날에 반드시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여러분도 부지불식간에 음녀의 미혹에 넘어가게 되고 급기야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엄하게 금하시는 음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야한다. 목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계14:4 이 사람들은(14만4천명)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보라, 우리 성도들은 그 음녀의 유혹을 뿌리친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은 모두 그 화려한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다.

 

본문 2절을 보시면 그 음녀의 유혹이 얼마나 달콤한지, 땅의 임금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 즉, 하늘에 속하지 않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음행을 행하던 자들이라고 나온다.

2절 “땅의 임금들도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위엣 것을 찾지 않고 땅의 것에 매달려 있으며 이 땅의 것으로 일희일비 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음녀와 함께 음행을 하고 있는 분들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실 이 음녀의 개념의 출발점은 구약 성경의 이세벨 왕비다.

그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였다. 시돈왕 엣바알의 딸이다. 그 이세벨 왕비는 아합왕에게 시집을 오면서 자신이 섬기던 우상을 함께 들여와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을 섬기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성경은 그러한 그녀를 가리켜 이스라엘로 행음하게 한 여자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계2:20 그러나 네(두아디라)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그 이세벨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미혹했는지 열왕기하 9장으로 가 보면,

왕하9: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이르되 예후야 평안하냐 하니 대답하되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하더라

 

음행과 술수로 이스라엘을 미혹했던 여자였다. 여기서 ‘술수’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케쉐프’가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는 활마케이아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활마케이아’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 똑같이 쓰인 곳이 있다.

 

계18:21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계18: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여기 큰 성 바벨론이 만국을 복술’‘활마케이아로 미혹했다고 한다. 바로 그 단어다.

그러니까 이 바벨론과 음녀는 같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벨론은, 즉 음녀는 이렇게 세상을 음행과 복술, 마술, 기적으로 미혹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의 힘을 사랑하며 추구하는 ‘음행’과 ‘마술, 복술’이 함께 등장할까? 여러분 마귀가 교회를 공격해서 음행을 조장하는 무서운 무기 중의 하나가 바로 기적이다. 잘 생각해 보라. 왜 사람들이 기적을 찾나? 그 기적이 나에게 적용이 되어서 나의 삶에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기적을 찾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기적의 추구’는 ‘기복’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음행’과 ‘복술’이 음녀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다. 결국 그 둘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동일한 욕구에서 출발된 것들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마술사 ‘시몬’이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기적을 좇다가 결국 어떤 저주를 받게 되나?

 

행8:18-20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을 저주하기를 네 은과 함께 네가 망할 지어다라고 저주한다.

마술사 시몬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적을 동원해서 돈을 벌고 싶었던 사람이다.

오늘날 신비주의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마술사 시몬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여러분 그건 우상 숭배이며 음녀의 속임수다.

 

이렇게 기복과 신비는 음녀, 큰 성 바벨론의 미혹이다.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성경이 이렇게 처참하게 기록하고 있다.

 

왕하9:36-37 ”돌아와서 전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였더라“

 

음녀 이세벨의 고기를 개들이 뜯어먹도록 저주하신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자들의 말로는 이처럼 처참하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음녀의 말로가 어떻게 묘사가 되고 있는지 계시록 17장 16절을 보자.

계17: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세벨의 말로와 똑같은 말로가 여기 나온다. 음녀도 살을 뜯긴다. 그런데 그 음녀의 살을 누가 뜯어 먹느냐하면 개가 뜯어먹고 ‘짐승’이 뜯어 먹는다. 둘은 같은 편 아닌가?

음녀가 타고 있던 짐승이 오히려 음녀를 뜯어 먹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하나 확인 할 수 있다. 악의 세력은 스스로 서로를 뜯어먹으며, 서로 서로 미워하고, 스스로 자멸한다는 것이다.

 

딛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세상에 속한 자들을 묘사하는데 그 목록 중 그들은 피차 미워한 자라는 대목이 있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공동의 유익 앞에서는 손은 잡는듯하지만

그러한 이익이 사라지게 되면 언제든지 서로를 적으로 여기며 미워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스스로 자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편인 것 같았던 짐승이 음녀를 뜯어먹는다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음녀의 미혹에서 건져진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여전히 서로 뜯어먹어야 하나? 아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을 대표적으로 특징짓는 단어가 ‘사랑’인 것이다. 너희들은 이제 서로를 뜯어먹는 개들이 아니라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요한 계시록은 이 음녀와 어린양의 신부를 정확하게 대조하고 있다.

음녀는 심판을 받아 살을 뜯기는 저주를 받게 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어린양의 신부는 화려한 혼인 잔치를 하게 된다.

음녀는 자기의 운명 공동체인 짐승에게 결국 뜯겨 먹히게 되지만, 어린양의 신부는 어린양 예수님께서 끝까지 보호하시고 사랑하셔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아름다운 존재로 만든다..

 

요한 계시록은 이렇게 흰옷을 입은 순결한 신부와 붉은 옷을 입은 음녀의 결국을 자세하게 기록함으로, 아직 이 땅에서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어린양의 신부들에게 용기와 위로와 격려를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계시록 14장4절에 그 신부들은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들이었다. 그 어린양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나?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시겠나? 그 어린양께서 우리 신부들에게 딱 한 가지 요구를 하고 올라가셨다.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의 신랑이신 어린양은 우리를 이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이렇게 음녀를 좇는 자들은 ‘피차 미워한 자들’이었지만 어린양을 좇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생각해 보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 위해 나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나의 유익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JX의 사랑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세상의 은을 좇을 수 있겠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왜 세상의 기적, 복술이 필요할까?

 

우리가 하는 종교 행위들은 모두 이 ‘사랑’을 만들어 내는 재료일 뿐이다. 성경공부, 큐티, 봉사, 헌금, 구제 이 모든 것은 ‘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재료들이다’

그런데 재료는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제품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그건 아무 소용없는 헛수고 인 것이다.

 

옷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이 원단과 실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것에만 만족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곧 파산하게 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성경 지식과 열심과 헌신을 가지고 ‘사랑’을 만들어 내셔야 하는 분들이다. 그러니까 다른 것 가지고 자랑하지 말라.

 

만일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그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누구누구는 복음을 몰라, 그러니까 그 사람하고는 놀지 마’라고 여러분에게 말하거든 ’이 음녀야 물러가라‘하고 외쳐야한다. 자기가 가진 성경 지식을 가지고 남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과 자기를 구별하는 배타의 무기로 쓰는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겠나?

그런 사람은 창고에다가 옷감과 실만 잔뜩 쌓아놓고 그 걸 쳐다보면서 만족스럽게 침만 질질 흘리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다. 그 사람은 곧 파산할 것이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그런 편협한 배타성이 아니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정답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이것이 배타성이다. 그러나 그 배타성은 ‘포용성’을 포함한 배타성이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시면 오늘이라도 우리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열어두고, 기다려 주는 포용성, 그리고 누구에게나 성장의 과정이 있듯이 아직 연약한 사람들을 기다려 주는 포용성과 인내심을 동반한 것이 진짜 기독교가 갖는 배타성이요 유일성인 것이다.

 

여러분이 기독교를 단순히 종교 적인 행위를 하는 정신적인 것으로만 알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아직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젖어 계신 분들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처럼 정신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영적인 것이다. 형이상학적이며 정신 적인 것은 물질세계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지만 영적이라는 것은 이 물질 세계 속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영적인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되어 그 영적인 나라를 바로 여기 이 땅에서 구현해 내는 연습과 훈련을 하는 것을 영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을 영성이 깊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러분이 40일 금식 기도를 하고 1000일 새벽기도를 하고 틈만 나면 입에서 찬양이 흘러나오고 방언 기도를 줄줄 하는 것을 영성이라고 착각하시면 안된다.

 

이런 것을 잘 못해도 내 이웃을 속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고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내가 손해를 좀 보는 것이 기독교이지 나의 종교 행위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다.

영성은 현실에 뿌리를 박고 있지 않으면 다 헛것이다. 잘 이해 하셔야 한다.

여러분은 이미 음행을 조장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음녀의 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신 분들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마라.

우리는 이제 ‘피차 미워하며 서로를 뜯어먹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흰 옷을 입은 어린양의 신부들이다.

우리 주님께서 선물해 주신 이 깨끗한 흰옷,

그 더러운 우상 좇느라 더럽히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깨끗하게 유지해서

우리 주님 만나는 날 서로 서먹서먹하지 않도록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해 서로를 사랑하자.

 

선택해야한다.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박지덕 담임목사